Remembering Dr. Succ-Jo Seo, Hyang seol
선진 실증의학의 선구자 The Pioneer of Advanced Positive Medical Science
1954년, 이 땅에 펼친 인간 중심, 환자 중심의 참인술 1954년, 이 땅에 펼친 인간 중심, 환자 중심의 참인술
국내 의료계에서 불모지였던 신경내과분야를 개척하여 하나의 독립된 진료과목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최신 의료기기로도 확진하지 못했던 신경계통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약물 처방에서는 달인이라고 할 정도로 임상의로서도 명성을
쌓았다. 의학계에서도 서석조 박사의 활약으로 독립적인 신경과학회의 창립과 전문의
제도의 신설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1971년 그는 내과게 신경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대한신경과학회의 전신인 대한신경내과학회 창립을 주도하며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청년 서석조, 의사를 꿈꾸다 Young Succ-Jo Suh, Dreaming of Being a Doctor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했던 서석조 박사 서석조 박사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가 되기를 꿈꾸며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실력으로
당시 한국인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던 교토부립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한국인 최초의
학생이 되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 비로소 귀국한 서 박사는 열악한 국내
의학계의 현실 속에서 서구의 선진 의학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며 단신으로 미국
유학길을 떠났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50년대, 그의 열정과 노력은 미국 의료계를 감동시켰다. 그는
동양인 임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바니바스병원, 뉴욕주 록퍼드 나이아가라
새너토리엄병원과 뉴저지시티 메디컬센터를 거쳐 1954년 코넬의과대학 신경내과
강사까지 역임하기에 이르렀다.
영친왕과의 인연 The Relationship with King Yeoung chin
6년간 계속된 영친왕의 마지막 병상 1963년, 대한제곡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뇌혈전증의 세 번째 발작으로 실어증과
왼손을 제외한 전신마비 상태였다. 서석조 박사는 김학중 박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산노(山王)병원에 입원해 있던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를 모시고 돌아와 성모병원
특실에 입원시켰다. 서 박사가 "이제 한국에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영친왕은 창 밖
너머 꿈에도 그리던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영친왕의
주치의로서 언어중추가 마비된 영친왕과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6년간 계속된
마지막 병상을 보살펴드렸다.
서석조 박사의 두각과 활약 Dr. Succ-Jo Suh's Outstanding Activities
세브란스의대 명강사 서석조 박사는 귀국과 동시에 세브란스 의과대학 내과 조교수로 교육을 담당했다.
신경내과 분야에서 국내 유일의 권위자였던 그는 해박한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실례를 통해 학생들이 손으로 몸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열정을 다해 가르쳤다.
가톨릭의대로 옮겨가게 되었을 때, 학생들이 다른 수업을 거부하면서까지 간곡히 남아
줄 것을 요구하였을 정도로 그는 의과대 최고의 명강사로 칭송받았다.
가톨릭의대 대학원 박사 1호 1960년 서석조 박사는 가톨릭의대 내과학 교실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학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서 박사였으나,
선배 교수의 권유와 부탁으로 1960년 박사논문 <쥐에 미치는 쌀밥의 효과>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대학원 의학박사 1호를 취득했다. 이 논문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러 학자들에게 인용되고 있다.
'뇌졸중' 용어의 효시 1961년 서석조 박사는 논문 <뇌졸중 환자 100례에 대한 임상적 관찰>에서
'뇌졸중'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서양의학계는 '뇌혈관손상증'이라는 의미의
C.V.A를 사용했고, 일반에서는 '중풍'이라는 한의학 용어를 썼다. 같은 질병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서 박사는 용어부터 정리하자고 주장하며
'뇌졸중(腦卒中)'이라는 용어를 발표, 의학계에 혁신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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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뇌졸중' 발표로 받은 상징
아산 신창벌에 심은 꿈, 순천향대학교 Dream growing in Asan, Soon Chun Hyang University
개업의로서 국내 최초, 의과대학을 설립하다 서석조 박사는 의료서비스의 질을 향상하려면 실력 있는 의사만이 아니라 미래를
책임질 학생 교육과 연구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에 병원을
개원한지 이틀 만에 의과대학 건립을 준비했다. 서 박사는 지역 균형 발전과
지역사회 봉사 정신의 일환으로 의료 및 학업 환경이 열악한 아산시 신창면에 단출한
교정을 짓고 1978년, 78명의 첫 신입생을 받으며 학교 문을 열었다. 이는 개업의사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과대학 설립이었으며, 고통 받는 환자와 우리나라 의료선진화를
위해 간절히 원했던 교육사업 의지의 실현이었다.
한국최초의 의료법인, 순천향병원 The Korea's First Medical Corporation, Soon Chun Hyang Hospital
국내 의료계를 변화시킬 현대식 종합병원을 건립하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의료서비스는 선진국에 비해 질적이나 양적으로 턱없이
부족했었다. 경제개발이 추진되고 의료보험제도가 확대되면 의사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예측한 서석조박사는 오랜 바람이었던 최신시설과 새로운 체계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건립코자 뜻을 세웠다. 그리고 허허벌판이었던 한남동 변두리 땅에 "천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순리"라는 박사의 좌우명과 "질병은 하늘이 고치고
의사는 그 과정을 도울 뿐" 이라는 의학 철학을 담아 1974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법인인 순천향병원을 개원하게 되었다.